■ 산행일시 : 2012년 2월 7일 09:00~14:40[5시간40분정도]
■ 산행코스 : 아래지도 참조
■ 산행거리 : 대략 14km전후
■ 누구랑 : 나홀로 [캐논 EOS와 더불어]
팔공산 갓바위[관봉]
팔공산의 남쪽 봉우리 관봉(冠峰)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 좌상으로서, 전체 높이는 4m에 이른다. 관봉이 곧 우리말로 '갓바위'이므로 흔히 '갓바위부처님'이라고 부른다. 또 머리에 마치 갓같은 판석(板石)이 올려져 있기에 그렇게도 부른다. 관봉은 인봉(印峰).노적봉(露積峰)과 함께 팔공산의 대표적 봉우리로서 해발 850m의 고봉(高峰)이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팔공산의 서남쪽이 모두 두루 조망(眺望)된다.
이 부처님은 화강암 한 돌로 만든 것인데, 몸뿐만 아니라 대좌도 역시 한 돌로 되어 있다. 불상의 광배(光背)는 없지만 뒤쪽에 마치 병풍을 친 듯 기다랗게 바위가 둘러져 있어 혹시 이 자연 바위를 광배로 삼았기 때문에 따로 광배를 만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머리는 소발에 육계가 큼직하고 그 위로 두께 15cm정도의 흡사 갓모양을 한 얇은 바위가 얹혀졌다. 바위 아랫면에는 육계에 맞닿는 곳에 둥근 구멍을 파서 육계에 맞도록 하였으며, 웃면 가운데는 같은 식의 둥근 구명을 도드라지게 하고 그주위에 화판(花瓣)을 조각했다. 그래서 어느정도는 인공적 조각임을 느끼게 한다. 얼굴은 양쪽 볼이 두툼하게 되어 있는 등 비교적 둥글고 풍만한 편이다. 입술은 굳게 다물어 대체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이목구비가 조화스럽게 잘 표현되어 있다. 이마 한 가운데는 백호(白毫)가 둥글게 솟았고, 오똑한 코 아래의 인중도 두드러지고 있다. 두 귀는 길게 양쪽 어깨에까지 늘어졌으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두 어깨는 반듯하고 넓어 당당한 신체와 잘 어울리고 있다.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고 있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 비슷한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이 수인은 석굴암(石窟庵) 본존불의 그것과 양식상 흐름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왼손은 결가부좌한 왼쪽 발 부근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해 약합(藥盒)을 올려놓았다.
불상에 표현된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인데 두 팔을 거쳐 두 무릎을 덮고 대좌 아래로 흘러내려 있으며, 불의의 옷주름을 표현한 선각(線刻)이 매우 유려하다. 그리고 가슴 앞에는 속옷의 일종인 승가리(僧伽梨) 혹은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보인다. 불상의 뒷면에는 옷의 표현이 없고 그냥 평면으로 되어 있다.
대좌는 신체에 비해 작은 편이다. 대좌 윗부분에는 길게 입은 옷의 끝자락이 엎고 있는데 이같은 대좌 형식을 상현좌(裳懸座)라고 한다. 이것은 팔공산 부근에 있는 군위(裙衣) 삼존불 가운데 본존불의 대좌형식과도 유사하다.
이 갓바위 부처님은 절에 전하는 바로는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수제자인 의현대사(義玄大師)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638년(선덕왕 7)에 조성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전체적 양식으로 보아 8~9세기 작품으로 보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정설이다. 현재 보물 제 4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암암(中巖庵),
돌구멍절로 더 널리 알려진 은해사에 딸린 암자다
이름과 같이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서로 기대고 덮으며, 만들어 놓은 돌구멍속의 절집이 신기하다.
옛날 돌구멍 절에서는 암자에서 홀로 수행하는 스님을 위해 한사람 분량의 쌀이 매일 솟아 나왔다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도둑놈이 그것을 알고 스님을 죽이고 돌구멍을 파헤쳤다. 그러자 돌구멍에선 쌀 대신 핏물이 솟구치고 돌바람이 불어 도둑놈은 돌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스님이나 도둑이나 쓸데없는 욕심을 내지 말라는 뜻이겠지.. 돌구멍절(중암암)은 신라 흥덕왕 때 심지왕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심지왕사는 41대 헌덕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
팔공산 약사암 풍경!
팔공산 용주암 풍경!
용주암서 명마산(장군바위)쪽으로 가다 바라본 능성고개와 환성산[감투봉]
명마산[장군바위] 풍경
용주암의 장독대 모습!
팔공산 갓바위[관봉]
정월대보름 다음날인데도 소원빌러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ㅎ 갓바위가 무지 유명한걍 ? ㅎ
요거이 들어올린다고 큰욕봤슴다..ㅎ
능성재에서 인증샷 한컷! ㅎ
중앙암위 삼인암 바위 - 삼인암(三印岩)이라 불리는 커다란 세 개의 바위, 경북 유형문화재 제332호인 삼층 석탑, 김유신 장군이 마셨다는 장군수(將軍水), 돌구멍절이라 불리는 중암암(中巖庵), 건들바위 등 볼거리가 많아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중앙암의 극락굴 앞쪽에 위치한 건들바위!
1만년을 살았다는 만년송(萬年松)
건들바위 밑을 지나 옆으로 걷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는 바위 사이의 좁은 길을 통과한 후에야 비로소 만년송을 바라볼 수 있었다. 커다란 바위 틈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만년송이 신령스럽게 느껴졌다. 안개까지 잔뜩 끼여 만년송을 비롯한 사물들이 흑과 백으로만 나눠졌다.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만년송은 세 개의 줄기로 갈라졌다. 뿌리는 바위의 서서북 방향과 동동남 방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만년송이 한 그루인지 아니면 두 그루가 하나처럼 보이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다만 세 줄기 가운데 한 줄기는 다른 두 줄기와는 껍질의 색깔과 갈라진 깊이 등이 다르게 보였다. 생육조건이 나쁜 암석무더기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 두 그루가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어(?) 따로 사는 것보다 한 그루로 함께 사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에 연리목이 된 것일까.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듯 하다.
중앙암의 극락굴 입구!
극락굴은 둥글둥글한 바위더미가 담을 만들고 지붕을 덮고 해서 만들어진 자연굴이다.
사람하나 간신히 빠져나가기 힘든 좁은 곳이 있어 조금 넉넉한 풍체를 지녔거나, 아랫배에 인품이 그득한 사람들은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욕심이 많거나, 죄를 많이 지었거나, 조강지처를 버렸거나, 첩살이를 하는 사람은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후대에 만들어진 우스개 소리겠지만 다들 결백함을 인정받았다는 듯이 호들갑들을 떤다.
중앙암의 3층석탑! - 신라 양식으로 고려 초기에 지어진 석탑이란다.
금당 앞에 일탑이라는 사찰 배치양식이 자연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조그만 공터에 감사하며 지어진 탑 같다.
중앙암[돌구멍절] 입구 풍경!
중앙암[돌구멍절] 모습
묘봉쪽서 바라본 중앙암과 그 주변 풍경
큰바위가 법당안으로 들어와 있는 "묘봉암" 모습!
조금 추웠지만 즐겁게 산행한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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