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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좋은 여행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는곳! 봉미산기슭의 보물 천국 천년고찰 "신륵사"

신륵사 [神勒寺]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봉미산 기슭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579~631 재위)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으며, 신륵사라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불우조(驪州牧佛宇條)에 의하면 신륵사는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璧寺)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벽사는 고려시대에 경내의 동쪽 언덕에 벽돌로 된 다층전탑이 세워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이 대찰(大刹)이 된 것은 나옹화상(懶翁和尙:혜근)이 입적할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난 뒤부터이다. 1379년(우왕 5) 각신(覺信)·각주(覺珠) 등이 절의 북쪽에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나옹의 초상화를 모신 선각진당(先覺眞堂)을 세우면서 많은 전각을 신축하고 중수했다. 1382년에는 2층의 대장각(大藏閣) 안에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봉안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영릉(英陵:세종의 능)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72년(성종 3) 절이 확장되고 다음해에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1702년(숙종 28)에는 위학(偉學)·천심(天心) 등이 중수했다. 1858년(철종 9)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해 중수했다. 현존 당우로는 금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여주 신륵사 조사당(驪州 神勒寺 祖師堂:보물 제180호)·명부전·심검당·적묵당·노전(爐殿)·칠성각·종각·구룡루(九龍樓)·시왕전 등이 있다. 또한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여주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보제존자석종(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鐘:보물 제228호)·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驪州 神勒寺 大藏閣記碑:보물 제230호)·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제231호) 등과 같은 문화재들이 있다.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

신륵사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조선 전기의 석탑. 보물 제225호. 높이 300cm. 이 석탑은 2층의 기단부 위에 다층의 탑신부가 있어 기본적인 구조는 신라나 고려의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각 부재의 세부조형은 전혀 다르다.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탑은 기단에서 탑신에 이르는 각 부재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지복석(地覆石) 위에 복련(伏蓮)이 조각된 하층 기단부가 있으며, 그 중석(中石)에는 화형(花形)으로 장식된 우주(隅柱)가 있고 그 사이에는 파도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갑석(甲石)은 상하에 앙련(仰蓮)과 복련이 있고 중간에 넓게 돌출된 띠가 있다. 상층 기단부의 중석 역시 화형의 우주가 있고 그 사이에 운룡(雲龍)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상층 갑석에는 복련만 새겨져 있다. 탑신부는 체감률이 완만하며 옥신석(屋身石)은 옥개석(屋蓋石)의 두께와 비슷할 정도로 낮다. 옥신석의 각 면에 우주가 있고 옥개석은 수평에 가까워 낙수면도 완만하며 합각 부분에서 매우 약한 반전(反轉)이 있을 뿐이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고 철제 찰주만 남아 있다. 현재 8층의 옥개석 위에는 작아진 옥개석과 옥신석이 1개씩 남아 있어 더 많은 층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 전탑. 보물 제226호. 높이 940cm. 한강변에 있는 암벽 위에 건립된 것으로, 지대석 위에 화강석으로 된 7층의 기단이 있고 그 위에 높은 6층의 탑신부가 있다. 기단 위에 탑신부의 받침을 마련한 것은 신라시대의 전탑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탑신부는 6층 부분만 높이와 너비가 급격히 줄어들었을 뿐 각 층의 체감률이 낮아 전체적으로 고준(高俊)해 보인다. 각 층의 옥개(屋蓋)는 옥신(屋身)에 비해서 극히 간략화되어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전(塼)으로 된 노반(露盤) 위에 화강석으로 된 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 등이 얹혀 있다. 탑 북쪽에 있는 이 탑의 수리비에 "崇禎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이라고 씌어 있어서 1726년(영조 2)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전탑이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신륵사에 있는 고려시대 석종형 승탑. 보물 제228호. 높이 190cm. 1376년 나옹이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檜巖寺)에서 경상남도 밀양으로 돌아가던 중 신륵사에서 입적하자 1379년 각신과 각주가 절의 뒤편에 있는 봉미산 중턱에 묘역을 마련하고 나옹의 사리를 봉안한 것이다. 넓은 묘역을 마련하고 전면에 박석을 깔았으며, 그 위에 넓은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놓여 있는 2매의 판석 중앙에 석종형 부도를 안치했다. 기단의 정면과 좌우면 중간에 2단의 계단이 있고, 탑신은 위로 갈수록 완만한 타원형을 이루다가 어깨부분에서 수평을 형성하고, 그 위에 보주를 조각했다. 이 부도의 형식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와는 다른 것으로 라마 탑계에 속하는 특이한 형식이다. 이러한 계단탑 형식의 부도는 통도사와 금산사 등에 있는데 이러한 형식을 모방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전개되는 석종형 부도의 선구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예이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신륵사에 있는 보제존자 나옹화상의 묘비(墓碑). 1379년 건립. 보물 제229호. 높이 212cm. 너비 61cm. 지대석 위에 3단의 직사각형 대석이 놓여 있는데 상단의 대석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그 위에 비신(碑身)을 얹었다. 대리석으로 된 비신의 양 옆에는 화강암 기둥을 세워 비신을 보강하도록 했으며 그 위에 목조건축물의 공포와 기왓골을 조각한 옥개석을 얹었다. 이러한 석비(石碑)의 조형은 이 절에 있는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와 비슷하다. 신라시대 이래 일반화된 형식인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는 고려 말기에 대석과 옥개석으로 변형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예이다. 비문의 내용은 이색(李穡)이 지었고, 글씨는 해서체로 한수(韓脩)가 썼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등. 보물 제231호. 높이 194cm. 전형양식에서 변형된 석등으로 화사석(火舍石)을 제외한 모든 부재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팔각 지대석 위에 기단부는 상대·중대·하대가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8각의 하대석에는 복련이, 상대석에는 앙련이 도식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중대석(간주석)은 그 길이가 상당히 짧아졌으며 각 면에는 꽃무늬가 장식된 아(亞)자형 안상(眼象)이, 각 모서리에는 연주형(連珠形) 우주가 새겨져 있다. 상대석 위에는 2단의 층급이 있으며 그 위에 납석제 화사석이 있다. 팔각형의 화사석 각 면에는 화사창(火舍窓)이 뚫려 있고, 모서리에는 반룡(蟠龍)이 조각된 원형기둥이 고부조(高浮彫)로 새겨져 있다. 화사석의 상단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아래 기둥 사이에는 고부조의 비천상(飛天象)을 장식했다. 전각(轉角)이 두꺼운 옥개석은 둔중한 느낌을 주며 각 면의 합각에 우동(隅棟)만이 둥글게 돌출되어 있다. 상륜부는 연꽃이 장식된 복발 위에 2단의 층급을 이룬 연꽃 봉오리형 보주(寶珠)가 얹혀 있다. 전체적으로 석등의 우아한 형태와 장식성이 돋보이며, 기단부의 간주석이 짧아져 상대와 하대의 구별이 뚜렷하지 않은데 이는 석등이 형식화되어가는 시대적 추이를 반영한 것이다. 보제존자석종 앞에 있으므로 보제존자인 나옹의 부도가 세워진 1397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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